용인의 3.1운동
- 용인의 3.1운동횃불 용인의 3.1운동
용인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나라를 지켜낸 고장이다. 1232년 처인성에서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을 격퇴하여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곳, 그곳이 바로 용인이다. 용인 사람들에게는 반외세· 구국항쟁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왔고, 그 정신이 되살아났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3·1운동의 횃불을 치켜 든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독립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독립을 선언한 후,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종교와 직업, 남녀노소의 구별도 없었다. 모두들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월에서 5월까지 전국 211개 군에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고, 참가한 인원이 202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홍종욱(1892~1968) 독립운동가 옥중사진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전우의 무덤과 고별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용인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3·1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1일 원삼면 좌항리에서 황경준· 최상근· 안명옥· 김은수· 이은표· 이인하를 비롯한 주민들이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로 향했다. 사암리· 맹리의 주민들도 뒤를 이었다. 3월 23일에도 성산리와 갈천리의 주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3월 24일에는 김량장보통학교 학생들이 졸업식을 마친 후 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주민들도 가세하였다.
용인의 3·1운동은 3월 28일과 29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수여면 김량장리 용인군청 앞에 1천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고, 모현면의 초부리, 포곡면의 삼계리· 둔전리· 유방리· 금어리, 내사면(양지면)의 대대리, 수지면의 고기리· 동천리· 풍덕천리, 읍삼면의 마북리 등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용인의 시위운동은 4월 3일까지 계속되었다. 기흥면의 하갈리· 공세리, 내사면의 남곡리, 읍삼면의 죽전리, 수지면의 상현리, 외사면(백암면)의 백암리, 원삼면· 남사면 등의 주민들이 연이어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용인의 3·1운동은 광범위하고 격렬했다. 원삼면· 이동면· 모현면· 내사면· 수지면· 읍삼면· 기흥면· 외사면· 남사면· 수여면 등 용인 전 지역에서, 주민· 학생· 스님· 기독교인· 천도교인 등 모두가 나서서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참가한 인원도 13,200여명에 달했다. 시위운동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면사무소·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하게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종각· 최우돌· 성락중을 비롯하여 35명이 사망하였고, 실종자 139명, 부상자 502명, 투옥자 65명 등, 직접 피해를 당한 사람이 모두 741명에 달했다.
용인의 3.1운동 일지는 다음과 같다.
날 짜 | 내 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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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 원삼면 좌항리 좌찬고개에서 황경준, 최상근, 안명근, 김은수 등의 주도로 200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까지 이어지는 시위를 전개 하였다. 이은표, 이인하는 시위대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좌항리, 가좌리, 사암리, 맹리, 문촌리 등지의 주민 수백명과 함께 면사무소에 집결한 시위대는 백암으로 이동하다가 일제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해산되었으며 수십명이 체포되었다. |
3월 23일 | 이동면 용덕사 승려들이 독립 선언서를 마을에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
3월 24일 | 김량장보통학교 졸업식 후 송요중, 박용중, 이영환, 이원경, 차거복 등의 주도로 30여명의 학생들이 시내로 나가 만세를 외치다가 헌병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
3월 28일 | 수여면 김량장리 용인군청 앞에서 임원호, 김경운 등이 주도하여 천여명의 군중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모현면 초부리에서 김병선, 권홍규가 이끈 시위대가 포곡면 삼계리에서 권종목이 이끈 시위대와 합세하였다. 이어 둔전리에서 정규복, 권명보가 이끄는 시위대와 함께 김량장으로 향하다가 유방리에서 헌병의 발포로 해산되었다. 한편 금어리에서는 홍종욱, 홍종엽 형제와 이인봉이 이끄는 시위대가 태극기를 전달하며 내사면 대대리를 거쳐 김량장으로 향하다 헌병의 발포로 해산되었다. |
3월 29일 | 수지면 고기리의 구장 이덕균과 안종각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어 동천리와 풍덕천리 면사무소를 거치며 2,000여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읍삼면 마북리로 향하다가 일본 헌병의 발포로 해산되었었으며 이 자리에서 안종각, 최우돌이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내사면 남곡리에서 천주교도인 한영규와 김운식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수 백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양지리에 이르기까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해산되었다. |
3월 30일 | 기흥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하갈리에서는 김구식의 주도로 만세시위를 벌이며 읍삼면으로 진출하려 하였다. 공세리 탑안골 강가에서 일어난 시위대역시 신갈까지 진출하여 면사무소를 습격하였으나 일본 헌병에 의해 해산되었다. 읍삼면 죽전리에서는 천교도인 이회신과 고주원이 수지면 상현리 독바위의 기독교인과 함께 만세시위를 일으켜 3백명이 참가하였지만 헌병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
3월 31일 | 외사면 백암리에서 3천여명이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으나 헌병의 발포로 1명이 피살되고 3명이 부상당했다. 원삼면 사암리에서는 3백여명의 시위대가 만세를 부르자 일본 헌병이 발포하여 성낙중이 피살되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남사면에서는 시위대가 면사무소를 습격 면장을 구타하고 동참을 요구하다가 헌병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동면 송전리에서 약 200명의 주민이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
4월 2일 | 원삼면, 내사면 남곡리, 남사면 창리, 외사면, 내사면 송문리 등지에서도 동시 다발적 만세 시위가 일어났으나 곧 해산되거나 사전에 저지되었다. |
4월 3일 | 외사면 백암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지만 사전에 저지되었다. 1919년 용인의 3.1운동은 모두 13,200명이 넘게 참가하였으며 35명이 사망하고 약 140명이 부상당하고 500명이 넘게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용인의 3·1운동 관련 순국하시거나 투옥되신 분은 다음과 같다. |
지금까지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용인의 3·1운동 관련 순국자 및 투옥자는 다음과 같다.
- 안종각(安鍾珏) 수지면 고기리
- 최우돌(崔又乭) 읍삼면 보정리
- 성락중(成樂衆) 원삼면 사암리
- 이덕균(李德均) 수지면 고기리 징역 1년 6월
- 김구식(金九植) 기흥면 하갈리 징역 1년 6월
- 권종목(權鍾穆) 포곡면 삼계리 징역 1년
- 황경준(黃敬俊) 원삼면 좌항리 징역 10월
- 최상근(崔相根) 원삼면 사암리 징역 10월
- 안명옥(安明玉) 원삼면 사암리 징역 10월
- 김은수(金殷秀) 원삼면 사암리 징역 10월
- 이은표(李殷杓) 원삼면 맹리 징역 10월
- 이인하(李寅夏) 원삼면 맹리 징역 10월
- 정규복(丁奎復) 포곡면 둔전리 징역 10월
- 홍종욱(洪鍾煜) 포곡면 금어리 징역 10월
- 홍종엽(洪鍾熀) 포곡면 금어리 징역 10월
- 한영규(韓榮圭) 내사면 남곡리 징역 10월
- 김운식(金云植) 내사면 남곡리 징역 10월
- 이용환(李容煥) 원삼면 좌항리 징역 6월
- 김성남(金性南) 원삼면 좌항리 징역 6월
- 김영달(金永達) 원삼면 좌항리 징역 6월
- 김창연(金昌淵) 원삼면 사암리 징역 6월
- 임원호(任元鎬) 수여면 김량장리 징역 6월
- 김경운(金敬云) 수여면 김량장리 징역 6월
- 이인봉(李仁鳳) 포곡면 금어리 징역 6월
- 김병선(金秉善) 포곡면 삼계리 징역 3월
- 이웅한(李熊漢) 원삼면 좌항리 태형 90
- 장지선(張志善) 원삼면 좌항리 태형 90
- 장병식(張秉植) 원삼면 좌항리 태형 90
- 조용산(趙龍山) 원삼면 좌항리 태형 90
- 황덕재(黃德在) 원삼면 좌항리 태형 90
- 황찬경(黃瓚景) 원삼면 좌항리 태형 90
- 변용섭(邊用燮) 원삼면 좌항리 태형 90
- 박흥도(朴興道) 원삼면 좌항리 태형 90
- 박흥준(朴興俊) 원삼면 좌항리 태형 90
- 강신복(姜信福) 원삼면 사암리 태형 90
- 한승원(韓昇源) 원삼면 가좌리 태형 90
- 허충태(許忠台) 원삼면 가좌리 태형 90
- 김춘일(金春日) 원삼면 가좌리 태형 90
- 박희적(朴熙積) 원삼면 가좌리 태형 90
- 이병연(李秉淵) 원삼면 가좌리 태형 90
- 이태현(李泰鉉) 원삼면 가좌리 태형 90
- 이범기(李範驥) 원삼면 가좌리 태형 90
- 이상철(李象喆) 원삼면 문촌리 태형 90
- 이은상(李殷商) 원삼면 문촌리 태형 90
- 오경렬(吳慶烈) 원삼면 문촌리 태형 90
- 서천길(徐千吉) 원삼면 문촌리 태형 90
- 안재섭(安在燮) 원삼면 문촌리 태형 90
- 권홍규(權洪圭) 포곡면 삼계리 태형 90
- 이도해(李道海) 수지면 고기리 태형 90
- 홍재택(洪在澤) 수지면 고기리 태형 90
- 강춘석(姜春錫)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권병선(權丙璇)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김영대(金英大)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김원배(金元培)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김현주(金顯周)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남연찬(南延燦)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윤만쇠(尹萬釗)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윤승보(尹昇普)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이달순(李達淳)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이희대(李喜大)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정원규(鄭元圭)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
- 진기회(陳器回) 수지면 동천리 태형 90